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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영화

[리뷰] 위대한 개츠비,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소설에서 영화로 혹은 영화에서 영화로

 [위대한 개츠비](2013)의 영어 제목은 [The Great Gatsby] 입니다. 이 '개츠비'라는 단어는 영화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듯 극중에 등장하는 주인공 '제이 개츠비'의 이름입니다. 외화의 원작을 발음 그대로 [더 그레이트 개츠비]라고 번역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아마 원작 소설 및 영화가 이 이미 국내에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원작의 후광을 등에 업으려면(?)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유리하겠다는 판단도 일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는 경우는 매우 흔하지만, 이미 영화화된 영화를 또다시 영화로 만들 만큼 원작의 여운이 긴 편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즈 루어만의 '위대한' 세계, 개츠비의 궁전

 영화의 감독 바즈 루어만은 화려한 비주얼과 색채, 고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진 감독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감독입니다. 대표작으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로미오와 줄리엣](1996), 니콜 키드먼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물랑루즈](2001), 니콜 키드먼과 휴 잭맨 주연의 [오스트레일리아](2008) 등이 있습니다. 모두 국내 영화팬들이라면 한 번 이상은 다 감상했을 영화로, 모두 감독의 색채를 잘 드러내주는 영화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도 영화 [물랑루즈]는 다음영화에서 현재까지도 평점 9점대를 유지하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영화 팬들의 다시 보고싶은 영화 목록에 항상 올라와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물랑루즈]에서 그랬던 것 처럼,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그만의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시각으로 '개츠비'의 궁전을 표현합니다. 마치 나이트클럽을 묘사한 것 같은 향락적 분위기 속에서도 고전과 현대를 믹스하는 그의 재능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호황과 향락의 뉴욕

 극의 배경은 1920년대 미국 뉴욕입니다. 초 호황이었던, 그래서 자연스럽게 향락적이었던 그 시대의 미국이 배경입니다. 극중의 이 시대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건조하고 차가운 이면을 가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무서우리만치 닮아 있습니다.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바로 이 시대의 남자로 등장합니다. 엄청난 부잣집에, 매일 파티를 여는 남자. 그러나 아무도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없는 베일에 싸인 남자. 그가 바로 개츠비입니다.

 영화속의 화자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 분)'와 '개츠비'는 극중 '개츠비'의 대저택에서 처음 조우합니다. 이 대목에서 '닉'은 개츠비의 미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일생에 너댓번 볼까말까한 미소'라고 말이죠. 디카프리오는 이 장면에서 정말 '일생에 너댓번 볼까말까한 미소'를 정말 멋지게 표현합니다. 그 멋진 미소 너머에 무엇이 담겨있을까 궁금해하게 만드는 미소입니다.

 

 

 

 '개츠비'는 매주 자신의 저택에서 파티를 엽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파티죠. 그런데 이 파티에는 초대장이 없습니다. 아무나 올 수 있는 파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개츠비'라는 남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호화로운 파티를 할 돈이 어디서 그렇게 끝도 없이 나오는지, 어느 지역 출신이고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사실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개츠비'의 저택에서 '개츠비'가 베푸는 호화로운 파티를 마음껏 즐기지만, 모두들 그저 호화로운 파티에 참석해서 향락의 문화를 즐길 뿐입니다.

 극중의 이런 대중들의 모습은 현대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화려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늘 쫓아다니지만, 표면적인 것들을 쫓을 뿐, 그것들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한 때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런 파티를 여는 사람은 누구일까 의구심을 가져보지만 이내 화려한 불꽃놀이에 도취되어 의문을 잊고 맙니다. 그저 드러나는 현상과 결과에 관심을 가질 뿐이죠.

 

 

 

 

미스테리하지만 치명적인 남자, 개츠비

 그러나 화려하고 향락적인 파티 속에서, '개츠비'가 사는 세상만큼은 단절된 듯 보입니다. 유일하게 고상하고, 젠틀합니다. 그야말로 미스테리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츠비'는 '닉' 과 의도적으로 친해지고자 하는 모습을 자꾸 보여줍니다. '닉'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개츠비'가 보여주는 행동은 그가 베푸는 호의가 의도가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실 '개츠비'는 전쟁 전에 '닉'의 사촌인 '데이지(캐리 멀리건 분)'를 만났었고, '데이지'의 곁에 있기 위해서 '데이지'의 집 건너편에 살면서, 혹시 언젠가 그녀가 와줄까 생각하면서 초대장 없는 파티를 매주 열어온 순정남입니다. 그에 반해 '데이지'의 남편인 '톰'은, 결혼 직후부터 바람을 피워 온 전형적인 부잣집 나쁜남자였죠.

 '개츠비'는 이내 '닉'에게 다른 사람을 통해 '데이지'와의 만남자리를 주선 해 줄 것을 부탁하며 숨겨진 의도를 드러냅니다. '닉'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줍니다. '닉'의 생각은, 극중에 말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바람둥이 못된 남편 '톰' 보다는 젠틀하고 부자이면서도 '데이지'만을 바라보는 남자 '개츠비'가 더 낫다는 생각이었던 듯 보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이 말이죠.

 

 

 

 

철없는 소녀같은 여인, 데이지

 '데이지'는 한없이 여리고 소녀같은 여인입니다. 남편 '톰 뷰캐넌(조엘 에저튼 분)'의 외도 사실을 알면서도 괴로워할 뿐 이렇다할 말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작인, 누군가 이끌어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의지박약한 여인입니다. 그녀는 옛 연인 '개츠비'를 다시 만나면서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그와 함께 몰래 떠나기를 원합니다. 반면에 '개츠비'는, 그녀가 남편인 '톰'과 정식으로 갈라서고 나서 둘의 관계를 깔끔하게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개츠비'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습니다. 너무도 여린 '데이지'는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할 용기가 없는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데이지'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 그녀는 정말 의지가 약하고 여린 여인으로 보입니다. 다소곳한 말투와, 바람피우는 남편을 보고만 있는 모습, '개츠비'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남편인 '톰' 앞에서는 옛정이 떠올라 차마 헤어지겠다고 말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톰'이 정말 멋진 남편이라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톰'은 심지어 결혼 직후부터 바람을 피워 왔던 못된 남편입니다.

 '데이지' 스스로가 결단하고 남편과 갈라서길 바랬던 '개츠비'지만 그의 인내심은 결국 바닥이 나고,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 '톰', 그리고 '닉'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톰'에게 폭탄 발언에 사뭇 광기어린 모습까지 보이고 맙니다. '데이지'는 '개츠비'의 그런 모습을 이해하기엔 너무 이해심이 얕았고, '데이지'는 '개츠비'의 뜻밖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결국 혼란스러운 마음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되죠.

 '개츠비'는 자리를 박차고 나선 '데이지'를 뒤따라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톰'과의 내연관계에 있던 '머틀 윌슨(아일라 피셔 분)'이 그들이 탄 차에 받혀 죽게 됩니다. 뒤따라오던 '톰'은 사고현장을 목격하고, 죽은 '머틀'의 남편 '조지 윌슨(제이슨 클라크 분)'에게 '머틀'을 죽인것이 '개츠비'이며, 덩달아 그녀와 바람피운 것도 '개츠비'라고 누명을 씌웁니다. '조지'는 아내를 가지고 논 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한 자신의 증오의 대상이 '개츠비'라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머틀'을 죽인 차를 운전한 사람은 '데이지' 였고, '개츠비'가 그녀를 위해 자신이 누명을 쓴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닉'은 '개츠비'에게 곧 잡힐테니 빨리 도시를 떠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개츠비'는 대답합니다. "데이지가 내일 아침에 전화하기로 했어. 우린 함께 떠날거야. 그 전에는 안돼."

 

 

 

 

한쪽의 뜨거움이 다른 한 쪽의 뜨거움까지 보장하지는 않는다

 사고가 난 날 밤에 밝혀지는 '개츠비'에 관한 진실은, 그가 본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과, 일종의 사기행각을 통해 다른사람의 유산을 가로채어 그의 부를 얻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대저택과 파티를 비롯한 모든 그의 삶이 오직 '데이지'라는 한 여자를 위해서 비롯되었다는 것, 심지어 전쟁 직후에 바로 '데이지'에게 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까지도 '개츠비'의 인생은 오직 '데이지'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한 예능 프로그램에는 '그린라이트' 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사연속의 주인공과 상대 이성이 현재 서로 호감을 가진 희망적 상태인지 아닌지를 '그린라이트'로 판별 해 주는 것입니다. 우연하고 장난스러운 매치겠지만, '개츠비'는 '데이지'가 사는 집 건너편에 살면서 그녀의 집앞 선착장에서 비취는 '그린라이트'를 보며 매일 그녀를 만날 희망을 이어왔습니다. 오직 그녀만을 만나기 위해, 오직 그녀와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살아올 수 있었던 일종의 '희망의 그린 라이트'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그녀만을 위해 살아왔고, 그녀를 대신하여 뺑소니의 누명까지 쓰면서까지 '데이지'와 함께하고 싶어했던 개츠비는 '톰'이 저지른 간통의 누명까지 뒤집어 쓰고 '머틀'의 남편 '조지'에게 총을 맞아 죽게 됩니다. 결국 '개츠비'는 자신의 누명을 벗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셈입니다.

 

 

 극중에서 이 '개츠비'라는 남자의 사랑은 배경인 향락의 뉴욕, 그리고 사람들과 대비되면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아내를 두고도 다른 여자를 쫓아다니는 '톰'이라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한 여자만을 바라보며 그녀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이 '개츠비'라는 남자도 있습니다. 자신이 없는 사이 결혼까지 해버린 여자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내던지는 남자의 이야기. 정말 영화 속에서나 보았을 그런 남자입니다. 물론 '개츠비' 역시 극 속의 남자이긴 합니다.

 반면 '데이지'는, 자신을 대신해 누명을 쓴 '개츠비'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인 '톰'과 함께 도시를 떠납니다. 마지막까지도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이한 '개츠비'는 이제 그녀의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개츠비'는 자신의 누명을 대신 지고 사라져준 속죄의 어린양에 불과합니다. '톰'에게도 개츠비는 속죄의 어린양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바람피운 사실에 대한 증거마저 지우고 죽어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 상황, 그린라이트인가요?

 '개츠비'가 늘 바라보던 '그린라이트'는 '개츠비'에게 희망의 상징입니다. 저 건녀편에 사는 사랑하는 '데이지'를 언젠간 만나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고, 꿈꾸던 삶을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그 희망을 눈으로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희망과는 달리, 상황은 '그린라이트'가 아니었습니다. '데이지'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개츠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고 있었겠지만 결국 진실은 그녀의 유약한 마음이 진실한 '개츠비'의 사랑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지 못함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데이지'를 위해 살인자의 누명을 쓴 '개츠비', 그러나 자신의 혐의가 '개츠비'에게 모두 전가되고 나자 '데이지'는 비겁한 선택을 합니다. '데이지'는 자신의 살인혐의도, 남편 '톰'의 간통혐의도 '개츠비'가 모두 뒤집어 써 주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새출발을 하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일말의 미안함이나 찝찝함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저 뒤돌아서 떠났을 뿐입니다.

 정승집 개가 죽을 때는 사람이 많아도 정승이 죽으면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요, '데이지' 뿐만이 아니라 '개츠비'의 파티를 즐겼던 사람들 중 단 한사람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오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이제 '개츠비'라는 존재는 즐겨씹는 껌처럼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유부녀와 바람피우고 증거인멸을 위해 상대여자를 죽인 남자, 왠지 수상쩍었는데 역시나 뒤가 구렸던 사람 쯤으로 남게 됩니다.

 

 

 

이 시대마저 비추는 쓸쓸함

 극중 '데이지'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자신을 채워주는 그것을 한없이 사랑하는 듯 하지만,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면 그것을 무참히 짓밟고 떠나버립니다. 마치 언제 그것이 자신을 채워주었냐는 듯이 말이죠. 사람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 지금의 시대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맹목적이고 본질을 망각한 쾌락, 그리고 그 쾌락이 사라졌을 때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본질.

 누구도 그 '개츠비'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고, 그 파티의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왜 그 파티가 중단되었는가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고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츠비'는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한 남자였지만, 그의 숭고한 사랑은 심지어 그 사랑의 대상인 '데이지'조차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의 열정과 사랑을 알았던 유일한 한 사람은 그의 친구가 된 '닉' 뿐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씁쓸함을 반대방향으로 돌려서 보면 희망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존재하는, 스스로도 암울하지만 희망을 보면서 사랑했던 남자 '개츠비'의 존재가 바로 그 희망적인 부분에 해당합니다. 결국 '개츠비'는 자신이 사랑한 '데이지'를 끝까지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죠. 그는 비록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을지라도,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개츠비' 속의 희망과 사랑은 '닉'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라는 글로 되살아납니다.

 어쩌면 원작자인 스콧 피츠제럴드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씁쓸함을 이 작품에 녹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어둡지만 희망적인 '개츠비'의 존재를 본 감독 바즈 루어만이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요.